가난한 사람들과 일생을 함께한 장기려 박사
의사가 천직이었던 장기려 박사는 고향이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며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성산(聖山)이다.
1950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대전환,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된다.
이때 장기려 박사는 가족을 북에 두고 차남만 데리고 남으로 오게 되는데 이것이 영영 이별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김일성 의과대생 이었던 장 박사는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천막을 치고
무료 진료소를 열어 부상자 진료에 밤낮이 없었다.
절대 빈곤의 시대 돈이 없어서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느님 앞에 맹세한 대로 일생을 바쳐 초지일관(初志一貫) 실천하신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평생을 자신의 월급을 어려운 환자의 치료비나 그늘진 곳에 지출을 하다 보니 그가 평생 살다간 곳은 옥탑방이었다고 하니 가난하고 힘없고 그늘진 자들에겐 자상하고 든든한 아버지며 의사였다.
4대가 의사인 장기려 박사는 후손들이 의대를 합격하는 날 가르침이 될 3가지 당부를 꼭 하셨다고 한다.
첫째 - 항상 공부하고 노력하는 의사이며
둘째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의사이며
셋째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는 의사였다고 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이라 할 수 있는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했으며 1943년 우리나라 최초의 간암 설상 절제수술(간의70%)을 성공하며 의료계발전을 앞 당기는 큰 공로가 있으니 인술의 귀감이 되고 있다.
"장기려 기념관"이 부산 초량동에 세워져 그의 고귀한 생애를 증언하고 있으니 작년이 고인의 25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 사업을 계획했으나,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이 취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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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선 기자 다른기사보기